실비아 플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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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비아 플래스는 1932년 보스턴에서 태어난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스미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1956년 시인 테드 휴스와 결혼했다. 1963년 소설 《벨 자》를 발표했고, 같은 해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사후 시집 《아리엘》이 출간되어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고백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작품은 자전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여성의 심리적 갈등, 사회적 억압 등을 다루며, 페미니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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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래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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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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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실비아 플래스 |
다른 이름 | 빅토리아 루카스 |
출생 | 1932년 10월 27일 |
출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
사망 | 1963년 2월 11일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
묻힌 곳 | 헵턴스톨 교회 |
국적 | 미국 |
교육 | 스미스 칼리지 (학사) 뉴넘 칼리지(케임브리지) 보스턴 대학교 |
직업 | 시인, 작가, 단편 소설가 |
언어 | 영어 |
활동 기간 | 1960년–1963년 |
장르 | 시, 소설, 단편 |
사조 | 고백시 |
대표 작품 | 벨 자, 애리얼 |
배우자 | 테드 휴즈 (1956년 결혼) |
자녀 | 프리다 휴즈, 니콜라스 휴즈 |
친척 | 오토 플래스(아버지), 오렐리아 쇼버(어머니) |
수상 | 풀브라이트 장학금, 글래스콕 상 (1955, Two Lovers and a Beachcomber by the Real Sea), 퓰리처상 (시 부문) (1982, The Collected Poems, 사후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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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2. 생애
실비아 플래스는 19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4][5] 아버지는 독일 출신의 보스턴 대학교 생물학 교수 오토 플래스였고, 어머니는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오렐리아 쇼버 플래스였다.[6] 1935년 남동생 워런이 태어났다.
플래스는 8세 때 아버지를 당뇨병 합병증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7]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여 8세에 『보스턴 헤럴드』에 시를 발표했으며,[10] 1950년 스미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3학년 여름 뉴욕의 잡지사 인턴 경험 후 우울증이 심해져 첫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훗날 자전적 소설 《벨 자》의 바탕이 되었다.[11]
1955년 스미스 칼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플래스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칼리지에서 유학했다. 1956년 그곳에서 영국 시인 테드 휴스를 만나 결혼했고, 이후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생활했다. 1960년 영국에서 첫 시집 《거인상》(The Colossus and Other Poemseng)을 출판하고 딸 프리다를 낳았으며, 1962년 아들 니컬러스를 낳았다.[19]
그러나 1962년 남편 휴스와 아시아 웨빌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렀고,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다.[19] 별거 후 플래스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창작에 몰두했고, 《아빠》(Daddy), 《레이디 라자러스》(Lady Lazarus) 등 강렬한 시들을 쏟아냈다. 1963년 1월에는 소설 《벨 자》를 빅토리아 루커스(Victoria Lucas)라는 가명으로 출판하여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혹독한 추위와 고독,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우울증은 깊어졌고, 결국 1963년 2월 11일 런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66] 사후 출간된 시집 《아리엘》은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1982년에는 시 전집으로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플래스는 웨스트 요크셔 헤프톤스톨에 묻혔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실비아 플래스는 1932년 10월 27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Jamaica Plain|자메이카 플레인eng에서 태어났다.[4][5] 어머니 오렐리아 쇼버 플래스(Aurelia Schober Plath, 1906–1994)는 오스트리아계 이민자의 후손이었고,[6] 아버지 오토 플래스(Otto Plath, 1885–1940)는 독일 제국 그라보(Grabow) 출신의 곤충학자로 보스턴 대학교에서 생물학 교수로 재직했다.[7] 플래스에게는 1935년에 태어난 남동생 워런(Warren)이 있었다.[5] 1936년 가족은 매사추세츠주 윈throp으로 이사했다.[107][8]플래스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여, 8세에 『보스턴 헤럴드』(Boston Herald) 어린이 섹션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10] 이후 지역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작품을 게재했으며, 11세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 외에도 그림에 재능을 보여 1947년에는 슐라스틱 예술 & 문학상(The Scholastic Art & Writing Awards)을 수상하기도 했다.[10]
1940년 11월 5일, 플래스가 8세였을 때 아버지 오토 플래스가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7] 당시 당뇨병은 치료가 가능한 병이었으나, 오토 플래스는 자신이 폐암에 걸렸다고 오인하여 치료를 거부하다 병세가 악화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린 플래스에게 깊은 정신적 충격을 남겼고, 이는 훗날 그녀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게 된다.[10] 아버지의 죽음 이후 플래스는 유니테리언교 신앙을 잃는 등 혼란을 겪었다. 1942년, 어머니 오렐리아는 플래스 남매와 함께 매사추세츠주 웰즐리로 이주했다.[7]
플래스는 웰즐리의 브래드퍼드 고등학교(Bradford High School, 현 웰즐리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1950년 졸업했다.[5] 졸업 직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The Christian Science Monitor)에 글을 발표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10]
1950년 스미스 칼리지(Smith College)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플래스는 우수한 학생으로, 대학 내 문학 잡지인 《스미스 리뷰》(The Smith Review) 편집자로 활동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의 지능 지수(IQ)는 160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대학 3학년을 마친 여름, 플래스는 뉴욕의 유명 여성 잡지 《마드모아젤》(Mademoiselle)의 객원 편집자로 선발되어 한 달간 뉴욕에서 생활했다.[5] 그러나 이 경험은 기대와 달랐고, 특히 존경하던 시인 딜런 토머스와의 만남이 무산되자 크게 실망했다.[109] 이 시기 플래스는 하버드 대학교의 글쓰기 강좌에 지원했으나 떨어졌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우울증 치료를 위해 전기 충격 요법(ECT)을 받기도 했으나, 1953년 8월 24일, 집 지하실에서 어머니의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며 처음으로 심각한 자살을 시도했다.[13]
며칠 만에 발견되어 목숨을 건진 플래스는 이후 6개월간 맥린 병원(McLean Hospital)에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루스 보셔(Ruth Beuscher) 박사의 관리하에 추가적인 전기 충격 요법과 인슐린 쇼크 요법을 받았다.[5] 플래스의 입원 및 치료 비용은 작가 올리브 히긴스 프로티(Olive Higgins Prouty)가 지원했다.[14][12] 플래스는 이 시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자전적 소설 《벨 자》(The Bell Jar)를 집필했다.[11]
플래스는 건강을 회복하고 스미스 칼리지로 돌아와 1955년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했다.[18] 졸업 논문 주제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나타난 이중인격 문제였다. 그녀는 우등생 클럽인 파이 베타 카파 회원이었으며,[11]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았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된 플래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뉴넘 칼리지(Newnham College)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케임브리지에서도 활발히 시를 쓰며 대학 신문 《바시티》(Varsity) 등에 작품을 발표했다. 그녀는 존경하던 교수 도로시아 크룩(Dorothea Krook) 밑에서 공부했다.[5]
2. 2. 결혼과 문학 활동
스미스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실비아 플래스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칼리지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뉴넘 칼리지에서 플래스는 활발하게 시를 썼고, 학내 신문 『Varsity영어』에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1956년 2월 25일, 플래스는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파티에서 시인 테드 휴즈를 만났다.[110] 플래스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잡지에서 휴즈의 시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만나고 싶었고, 파티에서 만난 후 자주 교류하며 서로에게 시를 써주다가 몇 달 후 결혼하게 되었다고 밝혔다.[16] 그녀는 휴즈를 "신의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진 "가수, 이야기꾼, 사자, 세계 방랑자"라고 묘사했다.[5] 두 사람은 1956년 6월 16일, 런던 홀본의 순교자 성 게오르기오스 교회에서 플래스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 후 플래스는 10월에 뉴넘 칼리지로 돌아와 학업을 이어갔다.[5] 이 시기 플래스와 휴즈는 점성술과 분신사바와 유사한 오컬트적 활동에 심취하기도 했다.[17]

1957년 6월, 부부는 미국으로 이주했고, 플래스는 9월부터 모교인 스미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강의와 창작 활동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18] 1958년 중반, 부부는 보스턴으로 이사했다. 플래스는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 정신과에서 접수원으로 일하며 저녁에는 시인 로버트 로웰이 주최하는 창작 세미나에 참여했다. 이 세미나에는 작가 앤 섹스턴과 조지 스타벅도 함께했으며,[18] 로웰과 섹스턴은 플래스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도록 격려했다. 플래스는 로웰과 자신의 우울증 경험을, 섹스턴과는 자살 시도 경험을 나누며 여성적인 관점에서 글을 쓰는 계기를 마련했고, 점차 자신을 더욱 진지하고 집중력 있는 작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5] 이 시기에 시인 W. S. 머윈을 만나 평생 친구가 되기도 했다. 1958년 12월에는 정신과 치료를 다시 받기 시작했다.[5]

1959년 말, 캐나다와 미국을 여행한 후 뉴욕주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예술가 공동체 야도에 머물렀다. 플래스는 이곳에서 "자신의 특이함에 충실하는 법"을 배웠다고 술회했지만, 여전히 매우 개인적인 소재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다.[5]
1959년 12월,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 프림로즈 힐 근처의 찰콧 스퀘어 3번지에 정착했다.[19][20] 1960년 4월 1일, 딸 프리다 휴즈가 태어났고, 같은 해 10월 플래스는 첫 시집 ''거인상''(The Colossus and Other Poems영어)을 출판했다.[19]
1961년 2월, 플래스는 두 번째 임신 중 유산을 겪었다. 이 경험은 "의회 언덕 필즈"(Parliament Hill Fields영어)를 포함한 여러 시에 영향을 미쳤다. 플래스는 자신의 치료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휴즈가 유산 이틀 전에 자신을 폭행했다고 주장했다.[21] 같은 해 8월, 반자전적 소설 ''벨 자''(The Bell Jar영어)를 완성한 후, 가족은 데번주의 작은 마을 노스 토턴에 있는 코트 그린(Court Green)으로 이사했다. 1962년 1월에는 아들 니컬러스 휴즈가 태어났다.[19] 1962년 중반부터 휴즈는 양봉을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플래스의 여러 시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5]
1961년, 플래스 부부는 찰콧 스퀘어 아파트를 아시아 위빌과 데이비드 위빌 부부에게 세를 놓았다.[22] 테드 휴즈는 아시아 위빌에게 강하게 끌렸고, 이는 상호적이었다.[22] 1962년 6월, 플래스는 자동차 사고를 겪었는데, 훗날 이를 자살 시도였다고 묘사했다. 1962년 7월, 플래스는 남편 휴즈와 아시아 위빌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었고,[19] 같은 해 9월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다.[19]
2. 3. 자살과 사후
1962년 10월, 남편 테드 휴스가 아시아 웨빌과 불륜 관계임을 알게 된 플래스는 휴스와 별거를 시작했다. 이 시기 플래스는 엄청난 창작열을 보이며, 훗날 그녀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시집 《아리엘》(Ariel)에 수록될 다수의 시를 집필했다. 1962년 12월, 플래스는 두 아이 프리다와 니컬러스를 데리고 런던으로 이사하여 프림로즈 힐 근처 피츠로이 로드 23번지에 세를 들었다. 이 집은 과거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살았던 곳으로, 플래스는 이를 좋은 징조로 여겼다.그러나 1962년부터 1963년까지 이어진 겨울은 영국 역사상 기록적으로 혹독한 추위를 동반했다. 수도관이 얼어붙고 어린 두 아이는 계속 병치레를 했으며, 집에는 전화조차 없었다. 별거로 인한 스트레스, 혹독한 추위, 독감, 경제적 어려움 등이 겹치면서 플래스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1963년 1월, 플래스는 주치의 존 호더에게 지난 6~7개월간 우울증이 지속되었으며, 최근 더욱 악화되어 "끊임없는 불안감, 자살 충동, 일상생활 대처 불능" 상태라고 털어놓았다.[27] 불면증에 시달렸고 체중이 약 9.07kg나 줄었지만[27], 겉으로는 평소처럼 외모를 가꾸며 지냈다.[27] 호더는 그녀에게 항우울제인 모노아민 산화 효소 억제제를 처방하고 입원을 권유했으나, 플래스가 거부하자 대신 간병인을 배치했다.[27] 테드 휴스는 훗날 이 항우울제가 플래스의 자살에 "핵심적인 요인"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플래스가 과거 미국에서 복용한 약과 동일 성분이었으나 영국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판매되어, 의사가 부작용 이력을 모른 채 처방했다는 것이다.[30] 그러나 항우울제 효과 발현 시간과 부작용 발현 시점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한다.

1963년 2월 11일 아침, 간병인이 도착하기 전 플래스는 아이들이 자는 방 문틈을 수건과 테이프로 막아 가스가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조치한 뒤, 가스를 틀어 놓은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다. 그녀는 아래층 이웃에게 의사를 불러달라는 메모를 남겼고, 간병인이 오기로 한 시간에 맞춰 자살을 시도한 정황 때문에 정말 죽을 의도가 있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누출된 가스로 인해 아래층 이웃인 트레버 토마스가 의식을 잃었고, 간병인이 뒤늦게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플래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66] 플래스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알 알바레즈는 그녀의 자살이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외침이었으나 응답받지 못한 결과라고 주장했지만[66], 플래스의 친구 질리언 베커와 의사 존 호더는 그녀의 자살 의도가 명확했다고 보았다.[66] 검시 결과,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 플래스는 웨스트 요크셔 헤프톤스톨의 성 토마스 사도 교구 묘지에 묻혔다.

플래스 사후, 그녀의 문학적 유산 관리는 남편 테드 휴스에게 맡겨졌다. 휴스는 플래스가 별거 기간 동안 쓴 일기 중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긴 부분을 없앴다고 인정했다. 또한, 1965년 출간된 시집 《아리엘》을 편집하면서 플래스가 본래 의도했던 시의 배열 순서를 바꾸어, 밝고 긍정적인 시로 시작해 점차 어둡고 절망적인 시로 끝나도록 구성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는 플래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 휴스(Olwyn Hughes)가 적극 개입하여 테드 휴스에게 불리한 내용의 출판을 막으려 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휴스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졌고, 플래스의 묘비에 새겨진 '실비아 플래스 휴스'라는 이름에서 '휴스' 부분이 사람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휴스가 직접 고른 묘비명은 "맹렬한 불꽃 속에서도 황금 연꽃은 심을 수 있다"인데, 이 문구의 출처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33] 또는 중국의 고전 소설 《서유기》[34]로 추정된다.
1965년 출간된 《아리엘》은 문단과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플래스를 고백파 시인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1981년에는 《실비아 플래스 시 전집》(The Collected Poems)이 출간되었고, 이듬해인 1982년 플래스는 사후에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한편, 플래스와 휴스의 불륜 상대였던 아시아 웨빌은 1969년, 휴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슈라(Shura)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플래스와 같은 방식으로 가스 오븐을 이용해 동반 자살했다. 플래스의 딸 프리다 휴즈는 작가이자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들 니콜라스 휴즈는 해양 생물학자가 되었으나 오랜 우울증 끝에 2009년 3월 16일 알래스카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5][36]
3. 작품 세계
실비아 플래스의 작품 세계는 그녀의 개인적인 삶과 경험, 특히 우울증, 아버지와의 복잡한 관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탐구 등을 강렬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고백시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5][11] 그녀의 시는 선명하고 때로는 충격적인 이미지,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주제로 확장하는 독특한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초기 시들은 딜런 토머스, W. B. 예이츠, 마리안 무어 등 그녀가 존경했던 시인들의 영향을 보여주며[37], 달, 피, 병원, 태아, 해골과 같은 개인적이고 자연에 기반한 이미지를 주로 사용했다. 1960년에 출판된 첫 시집 《거상과 그 외 시》는 죽음, 구원, 부활과 같은 주제를 다루며[37] 영국에서 기술적 성취를 인정받았다.[39]
1960년 이후, 특히 남편 테드 휴스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별거하게 된 이후, 플래스의 작품 세계는 더욱 어둡고 강렬해졌다. 감금과 임박한 죽음의 느낌, 아버지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37] 이 시기의 작품들은 분노, 절망, 사랑, 복수 등 격렬한 감정을 담아냈으며, 그녀의 사후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7] 이 시기 대표작들은 사후 1965년에 출간된 시집 《아리엘》에 주로 수록되었는데, 이 시집은 플래스를 20세기 주요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5] 로버트 로웰은 이 시집의 서문에서 플래스의 시를 "실린더에 6개의 탄약통을 넣고 러시안 룰렛을 하는" 것에 비유하며 그 강렬함을 표현했다.[72]
플래스는 시뿐만 아니라 자전적 소설 《벨 자》를 통해 젊은 여성이 겪는 사회적 압박과 정신적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11] 이 소설은 그녀가 스미스 대학교 재학 시절 겪었던 우울증과 자살 시도, 정신병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5][13]
플래스의 작품은 개인적인 고통의 기록을 넘어 여성으로서 겪는 억압과 소외, 정체성에 대한 깊은 탐구를 담고 있어 이후 페미니즘 문학 비평에서 중요한 작가로 재조명받았다.[66][74] 그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아버지와의 관계, 우울증과 죽음의 문제, 여성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아래 하위 섹션들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3. 1. 주요 주제
실비아 플래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요 주제들은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특히 아버지와의 복잡한 관계, 오랜 우울증과 자살 충동,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탐구는 그녀의 시와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 요소이다.아버지와의 관계플래스에게 아버지는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양가적인 감정의 대상이었다. 독일 그라보 출신으로 보스턴 대학교 생물학 교수였던 아버지 오토 플래스(Otto Plath, 1885–1940)는 플래스가 8살 되던 해인 1940년, 치료 시기를 놓친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7] 아버지가 자신의 병을 폐암으로 오인하고 치료를 거부했던 사실은 어린 플래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아버지에게 버려졌다는 느낌과 함께 일종의 배신감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플래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일종의 자살로 받아들였으며, 이 경험은 평생 그녀의 삶과 작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버지의 죽음 직후 플래스는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고, 8세의 나이에 첫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플래스의 복잡한 감정은 여러 작품에서 드러난다. 아버지의 무덤을 방문한 후 쓴 시 "진달래 길의 엘렉트라(Electra on Azalea Path)"나, 사후 출간된 시집 《아리엘》(Ariel)에 실린 시 〈아빠(Daddy)〉가 대표적이다. 특히 〈아빠〉에서 플래스는 아버지를 나치와 흡혈귀에 비유하며 극단적인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는 동시에, 떨쳐내고 싶은 거대한 존재로 묘사한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러한 아버지와의 관계, 즉 '아버지-딸 신화'가 플래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분석한다.
우울증과 자살플래스는 평생 우울증과 싸웠으며,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첫 자살 시도는 아버지의 죽음 직후인 8세 때였고, 스미스 대학교 3학년 때는 여성지 《마드모아젤》(Mademoiselle) 인턴 활동 후 우울증이 심해져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전기충격요법을 받았는데, 이때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훗날 자전적 소설 《벨 자》(The Bell Jar)의 바탕이 되었다. 1962년 6월에는 차를 몰다 길을 벗어나 강으로 돌진하는 사고를 냈는데, 스스로 이를 또 다른 자살 시도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1962년 남편 테드 휴스가 아샤 위빌(Assia Wevill)과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별거를 시작했고, 플래스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였다. 〈아빠〉, 〈레이디 라자러스(Lady Lazarus)〉 등 그녀의 대표작 대부분이 이 시기에 쓰였다. 〈레이디 라자러스〉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화자를 통해 자살 시도의 경험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63년 초, 기록적인 한파와 독감,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현실적인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플래스의 우울증은 극에 달했다. 주치의 존 호더(John Horder)는 그녀가 "끊임없는 초조함, 자살 생각, 일상생활을 해낼 수 없다는 특징"을 보이는 심각한 상태라고 진단하고 항우울제를 처방하며 입원을 권유했지만, 플래스는 이를 거부했다. 또한 플래스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체중도 약 9.07kg 감소했지만, 겉모습은 계속 가꾸며 우울증 특유의 죄책감이나 무력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결국 1963년2월 11일 아침, 플래스는 아이들이 자는 방의 문틈을 젖은 수건과 천으로 막은 뒤,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고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30세였다. 그녀가 남긴 메모("존 호더 박사에게 전화하세요")와 간호사가 오기로 한 시간에 맞춰 자살을 시도한 정황 때문에 이것이 정말 죽으려는 의도였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했으나, 당시 상황을 면밀히 조사한 경찰관이나 주치의 호더는 그녀의 자살 의지가 확고했던 것으로 보았다. 플래스의 친구이자 문학 평론가인 알 알바레즈(Al Alvarez)는 그녀의 자살이 도움을 구하는 외침이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못한 비극이었다고 술회했다.
여성의 정체성플래스의 작품은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적 억압과 내면의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벨 자》는 주인공 에스터 그린우드가 경험하는 정신적 혼란을 통해 1950년대 미국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획일적인 기대와 압박을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 '벨 자(유리종)'는 여성을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고 질식시키는 사회적 통념과 심리적 불안을 상징한다.
플래스의 시 역시 여성의 경험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탐구를 담고 있다. 특히 결혼과 출산 이후 쓴 시들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아침 노래(Morning Song)〉는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는 복잡한 감정을 "사랑은 뚱뚱한 금시계처럼 당신을 움직이게 했지. / 산파는 당신의 발바닥을 때렸고, 당신의 대머리 울음은 / 요소들 틈에서 제 자리를 찾았지."[70] 와 같은 독특한 이미지로 표현하며 모성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부상과 함께 플래스는 "망가진 여성 천재의 상징"으로 재조명받았다.[66] 그녀의 작품, 특히 사후 출간된 시집 《아리엘》은 여성의 억눌린 분노, 양가성, 슬픔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표현하여 많은 여성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작가 호너 무어(Honor Moore)는 《아리엘》이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며, 플래스가 "종이 위의 여성", 즉 확실하고 대담한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74]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플래스가 어머니 오렐리아 플래스(Aurelia Plath)와 비정상적으로 밀착된 공생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어머니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탐구하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3. 2. 문학적 특징
실비아 플래스는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고백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힌다. 그녀의 시는 선명하고 충격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며,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주제로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플래스는 8세 때부터 시를 썼으며, 첫 시는 ''보스턴 이브닝 트래블러''에 게재되었다.[5] 스미스 칼리지에 입학할 무렵에는 이미 50편이 넘는 단편 소설을 썼고, 여러 잡지에 작품을 실었다.[37] 스미스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글쓰기와 관련된 주요 상을 다수 수상했고, 여성 잡지 ''마드모아젤''에서 여름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다.[5] 1955년에는 졸업 시 "두 연인과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글래스콕 상을 받았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는 대학 간행물 ''Varsity''에 기고했다.[38]
플래스의 초기 시들은 딜런 토머스, W. B. 예이츠, 마리안 무어와 같이 그녀가 존경했던 시인들의 영향을 보여준다.[37] 이 시기 작품들은 달, 피, 병원, 태아, 해골 등 개인적이고 자연에 기반한 이미지를 주로 사용했다. 1959년 말, 뉴욕 주의 야도 작가 식민지에 머물면서 쓴 7부작 "생일 시"는 시어도어 로스케의 영향을 받았지만, 내용은 스무 살 때 겪었던 정신적 외상과 자살 시도 경험을 다루었다.[37]
1960년 말, 헤이네만에서 첫 시집 ''거상과 그 외 시''가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이 시집이 나올 무렵 플래스는 예일 젊은 시인 시리즈 경쟁에서 여러 번 최종 후보에 올랐고, ''하퍼스'', ''더 스펙테이터'', ''더 타임스 문학 부록'' 등 주요 매체에 시를 게재했으며, ''뉴요커''와 계약을 맺기도 했다.[39] ''거상''은 영국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펀치 (잡지)의 피터 디킨슨은 이 시집을 "진정한 발견"이자 "읽기에 즐거움"이라고 평했으며,[39] 맨체스터 가디언의 버나드 버곤지는 "뛰어난 기술적 성취"이자 "탁월한 솜씨"라고 호평했다.[39] 이 시집은 죽음, 구원, 부활이라는 주제를 탐구했다.[37] 그러나 1962년 미국 출판 당시에는 평가가 다소 엇갈렸는데, 기교는 인정받았지만 다른 시인들의 영향이 강하다는 지적도 있었다.[39]
1960년 이후 플래스의 작품 세계는 더욱 어둡고 초현실적인 풍경으로 나아갔으며, 감금과 임박한 죽음의 느낌,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37] 특히 테드 휴즈와의 결별 이후 약 두 달간 플래스는 분노, 절망, 사랑, 복수를 담은 40편의 시를 쏟아냈는데, 이 작품들이 그녀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7] 이 시들은 사후 1965년에 출판된 시집 ''아리엘 (시집)''에 주로 수록되었다. ''아리엘''은 플래스를 20세기 주요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그녀의 작품은 폭력적이거나 불안정한 이미지, 그리고 두운과 운율의 재치 있는 사용이 강렬하게 결합되어 주목받는다.[10]
''아리엘'' 출간 이후 비평가들은 이 시집을 플래스의 깊어지는 절망이나 죽음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의 극적인 죽음은 작품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5] ''타임'' 지는 ''아리엘'' 리뷰에서 "아빠"와 같은 시가 "아버지에 대한 병적인 사랑과 증오"를 "곤봉만큼이나 잔혹한 스타일"로 다루었다고 평했다. 또한 "'아빠'와 '레이디 라자루스' 같은 가장 격렬한 시들에서는 두려움, 증오, 사랑, 죽음, 그리고 시인 자신의 정체성이 아버지의 모습과, 나아가 독일 학살자들의 죄책감, 유대인 희생자들의 고통과 함께 검은 열기로 융합된다"고 분석했다.[72] 로버트 로웰은 ''아리엘'' 서문에서 이 시들을 "실린더에 6개의 탄약통을 넣고 러시안 룰렛을 하는" 것에 비유했다.[72] 한편, 플래스는 시에서 홀로코스트를 암시하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논란과 비판을 받기도 했다.[7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엘''은 2004년 런던 ''더 인디펜던트'' 지에서 10대 현대 시집 중 세 번째로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https://www.the-independent.com/arts-entertainment/books/features/the-ten-best-modern-poetry-books-73855.html]
일부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플래스를 "망가진 여성 천재의 상징"으로 여기며 그녀의 경험에 공감했다.[66] 작가 호너 무어는 ''아리엘''이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며, 플래스가 "종이 위의 여성", 즉 확실하고 대담한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부상했다고 말했다. 무어는 "실비아 플래스의 ''아리엘''이 1966년 미국에서 출판되었을 때… 야망이 깨어난 주부와 어머니들을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주목했다… 여기에는 여성의 분노, 양가성, 슬픔을 많은 여성들이 동일시하는 목소리로 타협하지 않고 기록한, 기술적으로 뛰어난 여성이 있었다"고 설명했다.[74]
플래스의 시 세계에서 종종 간과되는 부분은 풍경 시이다. 이 영역은 "그녀의 작품에서 풍부하고 중요한 영역"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노스요크 무어스를 배경으로 한 시들이 뛰어나다고 여겨진다. 1961년 9월에 쓴 시 "폭풍의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지만, 내용은 플래스 자신만의 페나인 산맥 풍경에 대한 독창적인 비전을 담고 있다.[71]
4. 주요 작품
실비아 플래스는 시, 소설, 일기, 어린이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거상과 그 외 시''' (''The Colossus and Other Poems'', 1960): 플래스가 생전에 유일하게 출판한 시집이다.[5]
- '''벨 자''' (''The Bell Jar'', 1963): 플래스의 유일한 장편 소설이자 자전적 성격이 강한 대표작이다.[26]
- '''아리엘''' (''Ariel'', 1965): 사후에 출판되어 플래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시집이다.[10]
- '''실비아 플래스의 일기''' (''The Unabridged Journals of Sylvia Plath'', 2000): 그녀의 내면과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캐런 V. 쿠킬이 편집했다.[55]
- '''체리 부인의 부엌''' (''Mrs. Cherry's Kitchen'', 2001): 어린이를 위해 쓴 동화책이다.
이 외에도 여러 시집과 산문집, 편지 등이 사후에 출판되었으며, 플래스의 작품들은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과 내면세계를 강렬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1. 시집
플래스는 8세 때부터 시를 썼으며, 그녀의 첫 시는 보스턴 이브닝 트래블러에 게재되었다.[5] 스미스 칼리지에 입학할 무렵에는 이미 50편이 넘는 단편 소설을 썼고, 여러 잡지에 작품을 실었다.[37] 스미스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글쓰기와 관련된 주요 상을 거의 모두 수상했고, 여성 잡지 마드모아젤에서 여름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다.[5] 1955년 졸업할 때는 "두 연인과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로 글래스콕 상을 받았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는 대학 간행물 ''Varsity''에 글을 기고했다.[38]1960년 말, 헤이네만 출판사에서 그녀의 첫 시집인 '''《거상과 그 외 시》(The Colossus and Other Poems)'''가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이 시집이 나오기 전에도 플래스는 예일 젊은 시인 시리즈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그녀의 작품은 하퍼스, 스펙테이터, 더 타임스 문학 부록 등 유명 매체에 실렸다. 《거상과 그 외 시》에 실린 시들은 이미 미국과 영국의 주요 저널에 발표되었던 것들이며, 뉴요커와 작품 게재 계약을 맺기도 했다.[39]
《거상과 그 외 시》는 영국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들은 플래스의 목소리가 새롭고 강하며, 개성적인 미국적 어조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잡지 펀치의 피터 디킨슨은 이 시집을 "진정한 발견"이자 "읽는 즐거움"이 있으며 "깨끗하고 쉬운 시"로 가득 차 있다고 호평했다.[39] 맨체스터 가디언의 버나드 버곤지는 "뛰어난 기술적 성취"이며 "탁월한 솜씨"라고 평했다.[39] 이 시집 출판으로 플래스는 시단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1962년 미국에서도 출판되었으나, 영국만큼 열띤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기교는 칭찬받았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다른 시인들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9] 후대의 비평가들은 《거상과 그 외 시》 시기의 작품들이 플래스의 후기 작품에 비해 다소 젊고 진지하며 과도기적인 성격을 띤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플래스의 명성을 확고히 한 것은 사후인 1965년에 출판된 시집 '''《아리엘》(Ariel)'''이었다.[10] 이 시집은 "폭력적이거나 불안정한 이미지와, 두운과 운율을 재치 있게 사용하는 것이 강렬하게 결합되어 특별히 주목받는다."[10] 출판 직후 평론가들은 이 시집에서 시인의 깊어진 절망과 죽음에 대한 갈망을 읽어내려 했고,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과 연결 지어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타임과 라이프 같은 주요 잡지들도 로버트 로웰이 서문을 쓴 이 시집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타임의 평론가는 특히 "아빠(Daddy)"와 "레이디 라자러스(Lady Lazarus)" 같은 시에서 공포, 증오, 사랑, 죽음, 그리고 시인의 정체성이 아버지의 형상과 어둡게 융합된다고 평했다.[113]
페미니즘 운동의 맥락에서 《아리엘》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플래스는 '시들어버린 천재 여성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많은 여성 독자들은 그녀의 시가 자신들의 억압된 경험과 감정(분노, 양가성, 슬픔 등)을 대변한다고 느꼈다. 작가 오너 무어는 《아리엘》이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플래스가 "활자화된 여성"으로서 대담하게 목소리를 냈다고 평가했다.[114] 플래스 자신은 생전 인터뷰에서 로버트 로웰의 1959년 시집 ''Life Studies''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아리엘》의 고백적인 작풍 변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플래스의 작품은 종종 로웰이나 W. D. 스노드그래스와 같은 동시대 고백 시 작가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녀의 친구였던 알 알바레즈는 플래스가 성숙기 작품에서 자신의 일상생활의 세부 사항들을 예술의 재료로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지적했다.[116]
1971년에는 《아리엘》의 원고에서 추출된 미발표 시들을 포함한 두 권의 시집 '''《물을 건너며》(Crossing the Water)'''와 '''《겨울 나무》(Winter Trees)'''가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시인 피터 포터는 뉴 스테이츠맨지에 기고한 글에서 《물을 건너며》를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고 평하며, "일류 예술가가 자신의 진정한 힘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극찬했다.[111]
1981년에는 테드 휴스가 편집하고 서문을 쓴 '''《시 전집》(The Collected Poems)'''이 출판되었다. 이 시집에는 1956년부터 그녀가 사망하기까지 쓴 시들이 모여 있으며, 이 작품으로 플래스는 사후에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플래스의 시에는 달, 피, 병원, 태아, 두개골 등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가 있다. 초기 작품에서는 딜런 토머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매리앤 무어와 같은 시인들의 영향이 보이지만, 1959년 이후 점차 자신만의 주제인 트라우마, 자기 붕괴, 자살 시도 등을 다루기 시작했다. 1960년 이후의 작품들은 죽음과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폐쇄적이고 초현실적인 풍경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휴즈와의 별거 이후 쓴 시들은 분노, 절망, 사랑, 복수 등의 강렬한 감정을 담아내며 그녀의 문학적 명성을 확고히 했다. 또한 플래스는 평생 동안 자연 풍경을 소재로 시를 썼으며, 특히 요크셔의 황무지를 묘사한 작품들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플래스의 작품을 단순히 자전적인 고백으로만 해석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러한 해석이 그녀 작품의 다른 측면들을 간과하게 만들고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로 격하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118][119][120][121]
=== 주요 시집 목록 ===
4. 2. 소설
실비아 플래스의 대표적인 소설은 그녀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벨 자》(The Bell Jar)이다. 이 소설은 플래스가 스미스 대학교 3학년 여름, 여성지 마드모아젤 인턴 경험 후 우울증 악화와 자살 시도, 이후 정신병원 입원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40][41] 플래스는 이 소설을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써야 했던 자전적 습작"이라고 묘사했다.[41]《벨 자》는 영국에서는 1963년 1월 '빅토리아 루커스'(Victoria Lucas)라는 가명으로 처음 출판되었고, 호평을 받았다.[26] 하지만 플래스의 어머니가 출판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플래스 사후인 1971년에야 출판되었다.[26][123] 플래스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설에 대해 "내 삶의 사건들을 모아 색깔을 더하기 위해 소설화한 것"이며, "정신적 붕괴를 겪을 때 얼마나 고립감을 느끼는지 보여줄 것"이라고 설명했다.[40] 소설 속 인물 '버디'는 플래스가 대학 시절 사귀었던, 예일 대학교 4학년생 딕 노튼을 모델로 했으며, 노튼이 결핵을 앓아 요양원에서 지냈던 일이나 플래스가 그를 문병하러 갔다가 스키 사고로 다리가 부러진 경험 등이 소설에 반영되었다.[124]
플래스는 이 소설을 통해 1950년대 여성들이 겪었던 사회적 제약과 노동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녀는 여성이 단순히 비서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가나 편집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글쓰기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42]
나는 이야기 속 녹색 무화과 나무처럼 내 삶이 눈앞에서 뻗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모든 가지 끝에서, 살찐 보라색 무화과처럼, 멋진 미래가 손짓하며 윙크했다[...] 내가 거기에 앉아 [어떤 무화과]를 결정할 수 없었을 때, 무화과가 주름지고 검게 변하기 시작했고, 하나씩 하나씩, 내 발치에 떨어졌다.
— 벨 자, 1963년
플래스의 다른 산문 작품으로는 단편 소설, 산문, 일기 발췌를 모은 《조니 패닉과 꿈의 성경》(Johnny Panic and the Bible of Dreams, 1977)과 사후에 발견되어 출판된 단편 소설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Mary Ventura and the Ninth Kingdom, 2019) 등이 있다. 아래는 플래스의 주요 소설 및 산문 작품 목록이다.
- ''벨 자'' (1963) - "빅토리아 루카스"(Victoria Lucas) 가명으로 출판된 유일한 장편 소설.
-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 1950–1963년 서신집'' (1975) - 서간집.
- ''조니 패닉과 꿈의 성경'' (1977) - 단편집 및 산문.
- ''실비아 플래스의 일기'' (1982) - 일기.
- ''마법의 거울'' (1989) - 스미스 칼리지 졸업 논문.
- ''실비아 플래스의 완전한 일기'' (2000) - 일기 완전판.
-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 (2019) - 단편 소설.
4. 3. 기타
플래스의 편지는 1975년 어머니 오렐리아 플래스에 의해 편집되고 선정되어 ''Letters Home: Correspondence 1950–1963eng''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26] 이 서간집의 출판은 부분적으로 미국에서 소설 ''벨 자''의 출판이 일으킨 강한 대중적 반응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26]플래스는 11세였던 1944년 1월 1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963년 2월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했다. 그녀의 초기 일기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으며 현재 인디애나 대학교 블루밍턴의 릴리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53][54] 성인이 된 후의 일기는 1950년 스미스 대학교 첫해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일기는 프랜시스 맥컬러프(Frances McCullough)가 편집하고 테드 휴스가 컨설팅 편집자로 참여하여 1982년 ''The Journals of Sylvia Platheng''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82년 스미스 대학교가 플래스의 남은 일기를 인수했을 때, 휴즈는 그중 두 권을 플래스 사망 50주년이 되는 2013년 2월 11일까지 봉인하도록 조치했다.[55]
휴즈는 말년에 플래스 일기의 더 완전한 출판 작업을 시작했다. 1998년 그가 사망하기 직전, 봉인했던 두 권의 일기를 개봉하고 프로젝트를 플래스의 자녀인 프리다와 니컬러스에게 넘겼다. 그들은 편집 작업을 캐런 V. 쿠킬(Karen V. Kukil)에게 위임했고, 쿠킬은 1999년 12월 편집을 완료했다. 2000년 랜덤 하우스의 임프린트인 앵커 북스(Anchor Books)는 ''The Unabridged Journals of Sylvia Platheng''를 출판했다. 이 완전판은 기존 판본에 비해 절반 이상이 새로 공개된 자료였으며,[55]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이 출판을 "진정한 문학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휴즈는 일기 관리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는 플래스의 마지막 일기, 즉 1962년 겨울부터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의 기록을 파기했다고 인정했다. 1982년판 서문에서 그는 "나는 [그녀의 마지막 일기]를 파기했는데, 그녀의 아이들이 그것을 읽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망각을 생존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겼다)."라고 밝혔다.[5]
5. 테드 휴즈와의 관계 및 논란
실비아 플래스는 1956년 2월 25일,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열린 파티에서 시인 테드 휴즈를 만나 같은 해 6월 결혼했다.[110][5] 두 사람은 문학적 동반자 관계를 이어갔으나, 휴즈의 불륜 등으로 인해 1962년 9월 별거에 들어갔다.[19]
플래스가 사망했을 당시 법적으로 혼인 관계였기 때문에, 휴즈는 플래스의 모든 저작물을 포함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휴즈는 플래스의 마지막 일기를 없앴고[56], 시집 『아리엘』의 시 순서를 바꾸어 출판하는 등[56] 유산 관리 및 편집 과정에서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또한 플래스의 묘비에 새겨진 '휴즈(HUGHES)' 성씨를 지우려는 시도가 반복되었고,[58][128] 휴즈의 연인이었던 아시아 웨빌이 딸과 함께 동반 자살한 사건 이후[61] 휴즈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특히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휴즈가 플래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으며, 시인 로빈 모건 등은 작품을 통해 휴즈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63] 이러한 비판과 논란 속에서 휴즈는 언론 기고[130] 등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으며, 1998년에는 플래스와의 관계를 다룬 시집 『생일 편지』(Birthday Letters)를 출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68][136] 플래스와 휴즈를 둘러싼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두 사람의 자녀인 니콜라스 휴즈가 2009년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있었다.[131][132]
5. 1. 결혼 생활과 별거
1956년 2월 25일,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열린 파티에서 실비아 플래스는 시인 테드 휴즈를 처음 만났다.[110] 1961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플래스는 휴즈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나는 이 잡지에서 테드의 시를 읽었고 매우 감명을 받았고 그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이 작은 축하 행사에 갔는데, 그곳에서 실제로 만났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서로를 많이 보았다. 테드는 케임브리지로 돌아왔고, 우리는 몇 달 후 갑자기 결혼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시를 계속 썼다. 그러다가 그런 감정에서 비롯된 것 같다. 우리 둘 다 너무 많이 쓰고,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했다."[16]
플래스는 휴즈를 "신의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진 "가수, 이야기꾼, 사자, 세계 방랑자"라고 묘사했다.[5]
두 사람은 만난 지 4개월 만인 1956년 6월 16일, 런던 홀본의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플래스의 어머니 오렐리아 쇼버 플래스(Aurelia Schober Plath)가 유일한 증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5] 신혼여행은 파리와 스페인 베니도름에서 보냈다. 같은 해 10월, 플래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칼리지(Newnham College)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갔다.[5] 이 시기 플래스와 휴즈는 점성술과 분신사바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17]
1957년 6월, 부부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플래스의 모교인 스미스 대학교에서 그녀가 영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18] 그러나 플래스는 가르치는 일과 글쓰기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고,[18] 1958년 중반에는 보스턴으로 이사했다. 플래스는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 정신과 병동에서 접수원으로 일하며 저녁에는 시인 로버트 로웰이 주최하는 창작 워크숍에 참여했다. 이 워크숍에는 작가 앤 섹스턴과 조지 스타벅도 함께했다.[18] 로웰과 섹스턴은 플래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도록 격려했다. 플래스는 로웰에게 자신의 우울증 경험을, 섹스턴에게는 과거 자살 시도에 대해 털어놓으며 여성적인 관점에서 글을 쓰는 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를 거치며 플래스는 자신을 더욱 진지하고 집중력 있는 작가로 여기게 되었다.[5] 또한 이때 시인 W. S. 머윈을 만나 그의 작품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고, 그는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1958년 12월, 플래스는 루스 보셔 박사(Dr. Ruth Beuscher)에게 다시 정신분석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5]
1959년 후반, 플래스와 휴즈는 캐나다와 미국을 여행한 뒤 뉴욕주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예술가 공동체 야도(Yaddo)에 머물렀다. 플래스는 야도에서 "자신의 기이함에 충실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매우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을 고백적으로 쓰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다.[5]
1959년 12월,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 리젠트 파크 근처 프림로즈 힐 지역의 챌코트 스퀘어 3번지에 정착했다. 이 집에는 나중에 플래스의 거주를 기념하는 잉글리시 헤리티지 명판이 부착되었다.[19][20] 1960년 4월 1일 딸 프리다 휴즈가 태어났고, 같은 해 10월 플래스는 첫 시집 《거인상》(The Colossus and Other Poems)을 출판했다.[19]
1961년 2월, 플래스는 두 번째 임신 중 유산을 겪었다. 이 경험은 "의회 언덕 들판"(Parliament Hill Fields)을 포함한 여러 시의 주제가 되었다. 플래스는 이후 자신의 정신과 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산 이틀 전 휴즈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21] 같은 해 8월, 플래스는 반자전적 소설 《벨 자》(The Bell Jar)를 완성했다. 직후 가족은 데번주의 작은 시골 마을 노스 토턴(North Tawton)에 있는 '코트 그린'(Court Green)이라는 집으로 이사했다. 1962년 1월 아들 니콜라스 휴즈가 태어났다.[19] 1962년 중반, 휴즈는 양봉을 시작했고, 이는 이후 플래스의 여러 시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5]
1961년 8월, 플래스와 휴즈 부부는 런던 챌코트 스퀘어의 아파트를 아시아 위빌(Assia Wevill)과 그녀의 남편 데이비드 위빌(David Wevill)에게 세를 놓았다.[22] 휴즈는 아시아 위빌에게 강하게 끌렸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1962년 6월, 플래스는 자동차 사고를 겪었는데, 훗날 이를 자살 시도였다고 묘사했다. 같은 해 7월, 플래스는 휴즈와 아시아 위빌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격렬한 다툼 끝에 1962년 9월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다.[19]
5. 2. 플래스 사후 논란
플래스가 사망했을 당시 법적으로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남편 테드 휴스는 플래스의 모든 저작물을 포함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휴스는 플래스가 결혼 생활 마지막 몇 달간 쓴 일기를 "아이들이 읽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며 없앴는데, 이 행동은 반복적으로 비판을 받았다.[56] 그는 또 다른 일기와 미완성 소설 원고를 분실했으며, 일부 서류와 일기 모음은 2013년까지 공개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점에서도 비판받았다.[57][133] 또한 휴스는 시집 《아리엘》(Ariel)을 편집하면서 시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바꾸어, 밝고 경쾌한 내용에서 점차 우울하고 어두운 내용으로 진행되도록 배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56] 실비아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 휴스(Olwyn Hughes)는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테드 휴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글의 출판을 막으려 했다.[56] 휴스는 플래스의 유산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통제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플래스의 시 작품으로 인한 로열티는 두 자녀 프리다 휴즈와 니콜라스 휴즈를 위해 마련된 신탁 계좌로 입금되도록 했다.[134][135]휴스에 대한 반감은 플래스의 묘비 훼손 사건으로 이어졌다. 헵톤스톨의 묘지에 있는 플래스의 묘비에는 "실비아 플래스 휴스(SYLVIA PLATH HUGHES)"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휴스'라는 성씨가 들어간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훼손되었다. 이들은 '휴스' 부분을 깎아내어 "실비아 플래스"라는 이름만 남기려 했다.[58][128] 1969년, 휴스의 정부였던 아시아 웨빌이 휴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슈라(당시 4세)와 함께 플래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동반 자살하자[61], 묘비 훼손 시도는 더욱 격렬해졌다. 훼손이 있을 때마다 휴스는 묘비를 교체했으며, 수리 중에는 묘비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59] 이에 분노한 추모객들은 언론 등을 통해 휴스가 묘비를 제거하여 플래스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비난했다.[60] 웨빌의 죽음은 휴스가 플래스와 웨빌 모두에게 학대적이었다는 주장을 더욱 부추겼다.[61][62]
급진 페미니스트 시인 로빈 모건은 1970년대에 "기소(Arraignment)"라는 시를 발표하여 휴스가 플래스를 폭행하고 살해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63] 그녀의 1972년 저서 ''몬스터(Monster)''에는 휴스에 대한 폭력적인 내용을 담은 글이 포함되어 있었고,[63][60][64] 휴스는 모건을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책은 출판사에서 회수되었지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계속 유통되었다.[65]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플래스의 이름을 걸고 휴스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거나 살인 혐의로 기소하려 하기도 했다.[66][1] 플래스의 시 "감옥지기(The Jailer)"는 화자가 남편의 잔혹성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모건이 편집한 1970년 페미니즘 선집 ''시스터후드 이즈 파워풀(Sisterhood is Powerful)''에 수록되었다.
1989년, 휴스가 대중의 공격을 받자 가디언과 인디펜던트지의 독자 투고란을 통해 논쟁이 벌어졌다. 같은 해 4월 20일, 휴스는 가디언에 "실비아 플래스가 평화롭게 잠들 곳(The Place Where Sylvia Plath Should Rest in Peace)"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비판과 플래스에 대한 환상("Plath Fantasia")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으며, 진실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것으로 비난받는다고 주장했다.[130][60][67]
1998년, 여전히 추측과 비난의 대상이었던 휴스는 플래스와의 관계를 다룬 88편의 시를 모은 시집 ''생일 편지(Birthday Letters)''를 출판했다. 휴스는 그동안 결혼 생활과 플래스의 자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기에, 이 책은 그의 첫 명시적인 입장 표명으로 받아들여져 큰 반향을 일으켰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시집은 플래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를 담고 있으며,[68][136] 포워드 시 상, T. S. 엘리엇 상, 휘트브레드 상 등을 수상했다. 출판 당시 휴스는 말기 암 투병 중이었으며 그해 말 사망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136]
플래스와 휴스의 아들인 니콜라스 휴즈는 우울증을 앓다가 2009년 3월 16일 알래스카주 페어뱅크스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5][36][131][132] 2015년에는 BBC Two에서 다큐멘터리 ''테드 휴스: 죽음보다 강하다(Ted Hughes: Stronger Than Death)''가 방영되었으며, 딸 프리다 휴즈가 처음으로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69][137]
5. 3. 휴즈의 입장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래스는 그녀가 사망할 당시 법적으로 부부 관계였기 때문에, 휴즈는 플래스의 모든 저작물을 포함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플래스의 마지막 일기를 "그녀의 아이들이 그것을 읽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며 불태운 일로 반복적으로 비난을 받았다.[56] 또한 휴즈는 플래스의 또 다른 일기 일부와 미완성 소설 원고("Double Exposure")를 분실했으며, 일부 서류와 일기 모음을 2013년까지 공개하지 말라고 지시한 점에서도 비판을 받았다.[56][57][133] 플래스의 시 작품으로 인한 로열티는 두 자녀 프리다 휴즈와 니콜라스 휴즈를 위한 신탁 계좌에 입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휴즈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유산을 통제하려 했다는 비난도 제기되었다.[134][135]플래스는 웨스트요크셔주 헤프턴스톨의 교구 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에는 휴즈가 선택한 "거센 불길 속에서도 황금 연꽃은 뿌리내릴 수 있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 문구의 출처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로 알려져 있으나, 아서 웨일리가 번역한 오승은의 『서유기』(''Monkey'')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6][127] 묘비에는 'SYLVIA PLATH HUGHES'라고 새겨졌는데, 'HUGHES'라는 성씨가 포함된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이 부분이 깎아내려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58][128] 특히 1969년 휴즈의 연인 아시아 웨빌이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슈라(당시 4세)와 함께 동반 자살한 사건 이후, 이러한 묘비 훼손은 더욱 심화되었다.[61][62] 휴즈는 훼손될 때마다 묘비를 교체했으며, 수리 기간 동안 묘비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59] 일부 플래스 추모객들은 언론을 통해 휴즈가 묘비를 제거하여 플래스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비난했다.[60] 웨빌의 죽음은 휴즈가 플래스와 웨빌 모두에게 학대적이었다는 주장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61][62]
급진 페미니스트 시인 로빈 모건은 1970년 "Arraignment"(죄상 인정)라는 시를 통해 휴즈가 플래스를 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녀의 1972년 저서 ''몬스터''에는 "플래스 애호가들이 휴즈의 성기를 거세하고 그의 입에 쑤셔 넣은 다음 그의 뇌를 날려버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작품"이 포함되어 논란이 되었다.[63][60][64] 휴즈가 법적 대응을 검토하자 출판사는 책을 회수했지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계속 유통되었다.[65]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플래스의 이름으로 휴즈를 살해하겠다고 협박하거나 그를 살인 혐의로 기소하려 시도하기도 했다.[66][1] 플래스가 남편의 폭력성을 비난하는 내용의 시 "The Jailer"(간수)는 모건이 편집한 1970년 페미니즘 선집 ''시스터후드 이즈 파워풀''에 수록되었다.[129]
계속되는 비난 속에서 1989년, 휴즈는 ''가디언''과 ''인디펜던트''의 독자 투고란을 통해 논쟁에 참여했다. 1989년 4월 20일 ''가디언''에 기고한 "실비아 플래스가 평안히 잠들어야 할 곳"("The Place Where Sylvia Plath Should Rest in Peace")이라는 글에서 그는 자신을 향한 비난이 '플래스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플래스] 사망 후 몇 년 동안, 학자들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실비아 플래스에 대한 진실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관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일찍 교훈을 얻었다... 만약 내가 어떤 환상을 바로잡기 위해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말하려고 너무 노력한다면, 나는 자유로운 발언을 억압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반적으로, 플래스 판타지와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으려는 나의 거부는 자유로운 발언을 억압하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실비아 플래스에 대한 판타지가 사실보다 더 필요하다. 그것이 그녀의 삶(그리고 나의 삶)의 진실에 대한 존중, 그녀의 기억, 또는 문학 전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겠다."[130] 그는 진실보다는 선정적인 이야기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항변했다.[60][67]
오랜 침묵 끝에 휴즈는 1998년, 플래스와의 관계를 다룬 88편의 시를 묶은 시집 ''생일 편지''(Birthday Letters)를 출판했다. 이 시집은 휴즈가 플래스와의 결혼 생활과 그녀의 자살에 대해 처음으로 명확하게 입장을 밝힌 것으로 받아들여져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집은 플래스가 사망한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쓰였으며, 그녀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그 이유를 탐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생일 편지''는 포워드 시상, T. S. 엘리엇 상, 휘트브레드 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출간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휴즈는 말기 암 투병 중이었고 그해 말 사망했다.[68][136]
플래스가 사망한 직후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 당시 플래스와 6개월간 별거 중이던 휴즈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플래스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것으로 나의 인생은 끝났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다"라고 심경을 토로했다.[125]
2009년 3월 16일, 플래스와 휴즈의 아들인 니콜라스 휴즈가 알래스카주 페어뱅크스의 자택에서 우울증으로 고통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31][132] 2015년 10월, BBC Two는 ''테드 휴즈: 죽음보다 강하다''(Ted Hughes: Stronger Than Death)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휴즈의 삶과 작품을 조명했으며, 플래스가 직접 자신의 시를 낭독하는 음성 녹음을 포함했다. 또한 그들의 딸 프리다가 처음으로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가 담겼다.[69][137]
6. 대중 매체
2003년 실비아 플래스를 다룬 전기 영화 《실비아》가 개봉하였다. 배우 귀네스 팰트로가 주인공 실비아 플래스를 연기하였다. 영화는 실비아와 테드 휴스의 애정 관계를 중심으로 실비아의 시인으로서의 성공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었다.
플래스와 휴즈 모두와 친구였던 엘리자베스 지그문트(Elizabeth Sigmund)는 영화가 실비아를 "영구적인 우울증 환자이자 소유욕이 강한 사람"으로 묘사한 점을 비판하면서도, "영화가 그녀의 삶 마지막 부분의 가슴 아픈 분위기를 정확하게 담아냈다"고 인정했다.[84]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당시 두 살이었던 딸 프리다 휴즈(Frieda Hughes)는 부모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어머니의 죽음을 오락거리로 만드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녀는 자신의 시 「레이디 라자루스」에 나오는 구절('땅콩 부스러기 먹는 군중', peanut-crunching crowd영어)을 인용하며, 대중이 가족의 비극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소비한다고 비판했다.[85][138] 2003년, 프리다는 이러한 심정을 담은 시 「나의 어머니」(My Mother)를 문학 잡지 ''타틀러(Tatler)''에 발표했다.[86]
이제 그들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몸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오븐에 머리를 넣고,
고아들을 만드는
... 그들은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어머니의 말을 주어야 한다고
그들의 괴물의 입을 채우기 위해,
그들의 실비아 자살 인형[139]
7. 한국에서의 실비아 플래스
(내용 없음 -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한국에서의 실비아 플래스'와 관련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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